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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왕정

 

르네상스, 종교 개혁, 신항로의 개척 등으로 16세기 유럽 사회는 개성이 중시되고 종교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활력이 넘쳤습니다. 종래 부의 상징이었던 토지를 소유하지 않으면서도 상업 활동을 통해 화폐를 소유한 신흥 시민층의 세력이 커졌으며, 각국은 경쟁적으로 해외 진출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사회 변화로 유럽의 정치 상황은 어떻게 변화하였을까요?

절대주의

절대주의란 국왕이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고 국가의 전권을 행사하는 정치 형태로서, 절대 왕정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절대 왕정에서 절대라는 말은 국왕이 봉건 귀족과 시민 계층 등 어느 누구에게도 제약을 받지 않는 절대적 권력을 행사하였다는 것을 의미하였으며, 이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왕권 신수설이 등장하였습니다. 왕권 신수설에 대해 보쉬에는 "국가 형태 중 가장 이롭고 가장 오래되고 자연스러운 것은 군주정이며, 군주의 권력은 대관식에서 교황으로부터 성유(聖油)가 부어졌기 때문에 신성하고 절대적입니다. 군주는 다만 신에 대해서만 책임을 질 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왕권 신수설에 의하면, 왕의 권한은 신으로부터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신성 불가침한 것으로, 국민들은 왕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절대 군주들은 봉건 국가에서 제후들이 장악하고 있었던 군대 지휘권, 외교권, 행정권, 재정권, 재판권 등을 한손에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절대 군주는 국가 통치권의 주체가 되었습니다. 

절대 왕정 시대 각국의 국왕은 강력한 국가 통치를 위해서 관료제와 상비군을 갖추었으며, 이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중상주의 경제 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절대 왕정은 봉건 귀족과 신흥 중산 시민층이라는 두 대립되는 힘의 균형 위에서 성립되었으며, 시민 계층이 이끌었던 시민 혁명으로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절대 왕정은 중앙 집권적 통일 국가였다는 점에서 지방 분권적인 중세 봉건 국가와 다르고, 국민의 권리가 인정되지 않고 봉건적 신분 제도를 유지하였다는 점에서 근대 국가와 구별됩니다. 따라서 절대 왕정은 중세 봉건 국가에서 근대 민족 국가로 이행하는 과도기에 출현했던 정치 형태라 할 수 있습니다.

 

각국의 절대 왕정

  •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1556~1598): 무적 함대라는 강력한 해군을 조직하여 1571년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 투르크를 격파하고 지중해의 해상권을 장악하였으며, 당시 동방 무역을 독점하였던 푸르투갈을 병합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에스파냐는 유럽 대륙 외에 세계의 주요한 식민지, 무역 시장, 해양 등을 지배하여 세계 사상 처음으로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 네더란드의 오렌지공 월리엄(1533~1584): 에스파냐가 가톨릭적인 통합 정책을 실시하자 1568년 독립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전쟁 중에 남부의 10주가 도중에 탈락했으나 북부의 7개 주가 1581년 독립을 선언하였습니다. 해운업이 발달하여 암스테르담이 유럽의 상업과 금융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1558~1603): 1559년 통일령을 반포하여 영국의 국교회를 확립하고 적극적으로 해외 진출을 장려하였습니다. 1588년 에스파냐의 무적 함대를 격파하여 해상 국가로서 기반을 확고히 하였으며, 1600년에는 인도 무역의 특허를 가진 동인도 회사를 주식 회사 형태로 설립하고 인도와의 무역에 특허를 주었습니다.
  • 프랑스의 루이 14세(1643~1715): 콜베르를 등용하여 국내 산업을 일으키고, 해외 무역을 장려하여 국부를 축적하였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강력한 군대를 양성하고 에스파냐 왕위 계승 전쟁,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 참전하였습니다. 베르사유 궁전을 축조하였으며, 학문과 예술을 장려하여 '태양왕'으로 불리었습니다.

 

절대 왕정기의 경제 정책, 중상주의

절대주의 국가는 통치를 위해 방대한 상비군과 관료 조직을 유지하고, 치열한 외국과의 경쟁을 이겨내기 위해 막대한 재정이 필요하였습니다. 각국의 절대 군주들은 재정의 확보가 국가 발전의 기초라는 인식 아래 새로운 조세 제도를 마련하고 중상주의 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중상주의는 상업과 무역 활동이 국가의 부를 증진시키는 가장 확신한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경제 정책입니다. 중상주의 이론의 핵심은 금·은 등 귀금속의 보유를 국부의 원천으로 인식하고, 이를 획득하려는 것입니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 군주는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 금·은의 채굴에 힘쓰는 한편 국외 유출을 엄격히 단속하였습니다. 

중상주의 경제 정책의 초기 단계는 금을 중시하여 이를 획득하려는 중금주의였다. 그러나 금의 산출 지역과 양이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부 국가를 제외하고는 금을 직접 획득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여 중상주의는 새로운 단계로 이행하게 되었습니다. 

중상주의의 제2단계는 수입을 억제하고 수출을 늘려 그 차액을 금이나 은으로 받아들이는 무역 차액주의였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수출세를 경감하거나 폐지하고, 수출 장려금을 지급하여 수출을 적극 장려하며, 수입을 금지하거나 이를 억제하기 위해 고율의 관세를 부과하였습니다.

중상주의 정책의 제3단계는 산업 보호주의였습니다. 이는 수출의 확대나 수입 억제의 기본이 되는 국내 산업을 보호 육성하려는 정책으로, 국내 생산의 확대로 수입 대체 품목을 늘리는 데 주안점을 두었습니다.

절대주의 국가는 초기 상업 자본주의의 토대 위에서 번영하였습니다. 이 시기의 특징은 상업이 어느 경제 분야보다도 현저하게 발달하여 전 경제 분야를 지배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신항로의 개척과 신대륙의 발견으로 급격히 촉진되었으며, 상업에 종사하는 시민 계층의 사회적 위상을 한껏 높이는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절대 왕정의 상업 장려와 시민 계층의 성장으로 인해 유럽 경제는 비약적으로 발전하였으며, 주식 회사 설립 등을 통해 대자본이 형성되었습니다. 이러한 급속한 상업상의 발전을 상업 혁명이라고 부르며, 이로 인해 상업 자본가들이 사회의 주도 세력으로 성장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