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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이탈리아의 화가이며 전기 작가인 바라지(1511~1574)는 그의 저서 <예술가들의 생애>에서 '로마 시대에 완성 단계에 이른 미술이 중세에 침입한 야만인들에 의해 파괴되어 조잡하고 추악한 중세 양식이 미술계를 지배하였는데, 르네상스기에 다시 완전한 고전 양식이 부활하여 융성하였다'라고 기술하였습니다. 과연 르네상스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르네상스의 의미

르네상스란 원래 크리스트 교적 중세 문화와 다른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 문화의 부흥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단순한 고전 문화의 부흥이 아니라 이를 바탕으로 신 중심의 중세 문화에서 벗어나, 개인의 해방과 자각을 강조하는 인간 중심의 문화를 탄생시킨 문화 운동이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 사람들은 현세를 즐기고 자연의 아름다움에 도취되면서 풍부한 인간성과 개인의 재능을 최대로 발전시키려는 욕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울러 자연 현상을 종교적, 이상적으로 보는 중세적 자연관을 배격하고 자연계의 법칙성을 탐구하였습니다. 이러한 인간관과 자연관은 크리스트 교 이전의 고전 고대에서 유래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르네상스는 인간주의와 자연주의라는 두 축에 의해 지탱되고 있는 복고적 혁신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문주의

르네상스의 근본정신은 인문주의였습니다. 인문주의는 인간적 가치를 추구하는 경향으로, 그리스·로마의 고전 작품을 수집·정리하고 연구하는 기풍 속에서 성장하였습니다. 인문주의자들은 수도원이나 각지의 장서를 뒤져 숨겨져 있던 고전을 찾아내는 데 열중하였고, 이를 통해 현세의 사물을 신과 관계없이 그 자체로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단테는 <신곡>에서 인간성에 대한 깊은 이해를 나타내었습니다. 페트라르카는 라틴 작가의 작품을 수집하여 연구하였는데, 그의 서정시도 그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보카치오는 <데카메론>에서 세속적인 생활을 자유롭게 묘사하고 인간의 욕망을 긍정적으로 보았습니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르네상스는 14세기경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탈리아는 고대 로마 문화의 중심지이며, 비잔티움 제국의 멸망 이후 그곳의 고전 학자들이 망명하여 고전 문화 연구가 활발하였습니다. 또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로서 도시들이 번영을 누리고, 일찍부터 시민 계층이 성장하여 자유로운 기풍이 퍼졌습니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는 정치적으로 통일되지 못한 상태에서 도시의 대상인과 교황의 지원을 받아 학문과 예술 중심으로 발전하였습니다. 그 절정기는 15세기에서 16세기 초에 걸친 시기였는데, 이후 신항로의 개척으로 지중해 무역이 쇠퇴하고 대서양이 무역의 중심지로 등장함에 따라 쇠퇴하였습니다.

 

알프스 이북의 르네상스

르네상스는 16세기 알프스 산맥을 넘어 유럽 전역으로 퍼졌습니다. 알프스를 넘어간 르네상스는 고전의 연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현실 사회와 교회를 비판하는 등 사회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습니다. 특히 초기 크리스트 교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성서를 연구하여 종교 개혁으로 이어졌습니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가 탐미적이고 새로운 예술을 탄생시켰다면, 알프스 이북의 르네상스는 사회 비판적인 성격을 띠었으며, 각국의 국민 문학의 싹을 틔웠습니다.

 

 

르네상스 미술의 발전

르네상스 미술은 피렌체를 중심으로 번성하며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그러나 서유럽에서 가장 부유했던 피렌체 상인들은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으로 그 지위를 서서히 잃었습니다. 베네치아 상인들 역시 비잔티움 제국이 멸망한 이후에는 지중해 무역 항로를 잃었지요. 그리고 로마 약탈 사건으로 교황청으로 들어오는 수입이 절반 이하로 급격히 떨어졌습니다. 유럽의 강대국들은 이러한 변화를 눈치챘습니다. 교황에 대한 경외심과 두려움도 없어졌지요. 그러자 교황은 우선 가톨릭 교리를 엄격하게 지키는 방식으로 당시의 정치 상황과 개신교의 종교 개혁에 대응하려 했습니다. 교황청의 고위 성직자들은 가톨릭 세력이 약해진 주요한 원인이 창의적인 인문학자들이 발전시켜 온 인문주의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인문주의의 확산으로 합리주의적이고, 실용적인 지식을 갖춘 개인이 탄생했고, 이러한 지식인들이 종교 개혁을 부추기고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교황청의 고위 성직자들은 반인문주의 운동을 벌입니다.

한편 이제 더 이상 이탈리아 상인들에게 기댈 수 없었던 교황은 강력한 군대와 부를 가지고 있는 에스파냐를 후원 세력으로 선택합니다. 당시 에스파냐는 신대륙을 발견해서 막대한 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에스파냐는 당시 서유럽에서 가장 중세적인 봉건 국가였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보수적인 가톨릭 국가였습니다. 에스파냐 군인 출신 수도사인 이그나티우스 데 로욜라는 종교 개혁에 맞서기 위해 예수회를 만들었습니다. 교황은 이 수도회에 종교 재판권을 주었고, 가톨릭교회를 지키는 임무를 맡겼습니다. 이렇게 해서 피렌체를 중심으로, 메디치 가문의 후원에 힘입어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르네상스 문화는 서서히 저물어 갔습니다. 피렌체의 부유한 상인들과 메디치 가문 사람들이 예술에 영향을 미치던 시대가 막을 내린 것입니다.

이러한 흐름에 따라 이탈리아 각지의 유명한 예술가들은 로마 특권층의 부름을 받고 모두 로마로 몰려들었습니다. 피렌체의 문화가 인본주의 사상과 이에 대한 신념을 배경으로 하였다면, 16세기 초반의 로마는 종교 개혁 운동을 극복한 가톨릭교의 교리와 신념이 그 바탕이 되었습니다. 피렌체가 권력자인 메디치 가문의 '메세나(기업이 문화, 예술, 과학, 스포츠 따위의 분야를 지원하는 활동)'를 통해 찬란한 예술 문화를 꽃피웠다면, 로마는 막강한 권력을 쥔 교황과 추기경, 은행가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하여 1500년대 로마의 문화적 기세는 그 이후로도 계속 팽창하여 17세기 바로크 예술로 연결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