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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영화 <마지막 황제>를 보면 변발을 한 중국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청대에 이르러 한족에게 만주족의 풍습을 강요한 까닭입니다. 한족이 세운 명은 어떻게 운영되다가 만주족인 청에게 멸망당했을까요?

 

명의 건국과 발전

왕실의 사치와 낭비로 재정이 궁핍해지자 원은 교초를 남발하고 백성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였습니다. 그러자 생활이 어려워진 백성들이 각지에서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14세기 후반 홍건적 출신의 홍무제(주원장)은 양쯔강 하류 지역의 곡창 지대를 점령하고 명을 건국한 후, 원을 몽골 고원으로 쫓아내고 중국을 통일하였습니다. 홍무제는 몽고족의 풍습을 금지하고 과거제와 법률을 정비하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해금 정책을 실시하여 중국인의 해외 도항을 금지하였습니다.

15세기 초 영락제는 환관을 중용하고 황제를 보좌하는 내각 대학사를 두었습니다. 또한 강남과 베이징을 연결하는 운하를 정비하고 도읍을 베이징으로 옮겼으며, 정화를 해외에 파견하여 여러 나라의 조공을 촉진하였습니다.

 

빈민 출신 황제 홍무제

중국 역사에는 서민에서 왕후장상이 된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빈민이 황제 자리에까지 오른 예는 많지 않은데, 명을 세운 홍무제(주원장)와 한을 세운 유방이 그들입니다. 홍무제가 태어난 곳은 화이허 유역의 호주(지금의 안후이 성)로, 홍수와 한발의 피해가 많아 후대에도 '10년 중에 9년은 흉작'이라고 불리던 곳입니다. 홍무제는 이 지역 빈농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홍무제가 황제가 된 후 고향에 있는 부친의 무덤을 정비하여 황릉이라 하였는데, 그때 세운 비석에 다음과 같은 문장을 새기도록 하였습니다.

 "옛날, 우리 아버지는 이 지방에 사셨으나 농사에 어려움이 많아 끼니를 걱정하며 살았다. 그중에 갑자기 전염병이 유해하여 가족 모두가 병에 걸렸다. 그때 아버지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시고 큰 형도 죽었다. 지주는 이 어려움도 몰라 주고 야단만 칠 뿐 무덤 쓸 땅조차도 주지 않았다. 그때 지주의 형이 의협심을 보여 이 땅을 주었다. 묻으려 해도 관도 없어 다만 볼품없는 옷으로 덮었을 뿐이었다."

황릉 건설을 위해 주위에 있는 민가의 무덤을 철거하려는 관료에서 홍무제는 "이들은 모두 우리 집의 오랜 이웃들인데, 철거할 수 없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황릉의 능력은 백성들에게 개방되어 성묘도 자유롭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명의 황제들은 거대한 능묘를 만들었습니다.

 

명의 쇠퇴

영락제의 사후 내치와 재정 안정을 위해 명은 대외 소극책을 취해 내몽고에서 후퇴하고, 베트남의 독립을 허용하였습니다. 정치는 환관의 세력 증대와 관료의 정권 다툼으로 혼란해졌고, 16세기에는 북의 타타르, 동남 해안의 왜구의 활동이 활발해졌습니다. 16세기 후반에 장거정의 개혁이 있었으나 성공하지 못하였습니다. 16세기말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에 대항하여 구원군을 파견하고 동북 지방에서 여진족과 싸우느라 재정난이 심각해졌습니다. 민중은 과중한 세금에 괴로워했지만 당쟁은 격해지고 환관의 횡포도 심하였습니다. 사회 불안 속에서 폭동이 각지에서 일어나 명은 이자성의 반란군에게 멸망하였습니다. 

 

사회 경제

명대에는 신사(향신)층이 지방의 지배 계급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이들은 학생이거나 전직 관료로서 여러 가지 특권을 가지고 지방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였습니다.

경제에서는 미곡 생산 중심지였던 양쯔강 하류 유역에서 16세기경부터 면직물, 견직물로 대표되는 가내 수공업이 활발해지면서 그 원료가 되는 면화와 양잠에 필요한 뽕나무를 재배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명 말에는 현재의 후베이·후난 성 지방이 새로운 곡창 지대가 되었습니다. 또한 국내 수요의 증가와 유통의 확대, 그리고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상인들의 대량 매입 때문에 차와 도자기 생산도 활발해졌습니다.

상업과 수공업이 발달하면서 전국적인 유통망이 형성되자 주요 도시에는 같은 고향 출신의 상인, 수공업자의 상호부조 조직이 만들어졌습니다. 또한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일본인이 가져온 일본 은과 유럽 상인이 가져온 멕시코 은이 대량으로 유입되자, 지폐와 동전 대신에 점차 은이 주요 화폐로 유통되었습니다. 16세기 중엽부터는 토지세와 인두세를 은으로 납부하는 일조편법이 시행되었습니다.

상업 경제의 발전과 함께 상인과 지주를 겸하는 사람이 늘어났고, 지주들 중에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일반 농민의 생활은 여전히 어려워 폭동이 계속되었습니다. 광둥·푸젠의 농민 중에는 법을 어기면서 동남아시아 등에 이주하는 사람도 많아졌는데, 이들이 현재 동남아시아 화교의 기초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문화

명에서는 실용과 실천을 제일로 하는 문화가 발달하였습니다. 성리학을 관학으로 삼은 명은 <사서대전>, <오경대전> 등의 편찬을 통해 성리학을 널리 펴고자 하였으나, 16세기에는 지행합일을 주장하는 양명학과 실용적인 것을 중시하는 실학이 활발해져 약학·농학·공학 관련의 책들이 나왔습니다. 명 말, 청 초에는 실증을 중시하는 고증학이 등장하여 많은 학문 분야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송·원대에 싹텄던 서민 문화는 계속 발전하여 명대에 <삼국지연의>, <수호전>, <서유기>, <금병매>와 같은 소설이 나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