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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문화

 

흔히 중세를 '암흑시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12세기부터 학문과 예술이 부활하고 인간의 개인적 가치가 존중되기 시작합니다. 그런 이유에서 찰스 호머 해스킨스라는 미국의 역사가는 1927년에 <12세기의 르네상스>라는 저서를 집필하여 중세 문화의 중요성을 역설하였습니다. 그럼 중세 문화는 어떻게 형성되었고 특징은 무엇일까요?

 

중세 문화 발달의 배경

중세 유럽은 봉건 제도와 장원 제도의 토대 위에서 점차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어 이를 바탕으로 11세기 이후 중세 문화가 개화하였습니다. 농업 생산력이 늘어나면서 인구가 증가하였고, 상업과 대외 무역이 부활되면서 도시와 도시 문화가 발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도시는 점차 문화와 교육의 중심지로 바뀌었습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저술이 재발견되면서 활발해진 문화 활동은 동방 교역의 부흥, 십자군 원정, 그리고 에스파냐에 거주하던 이슬람 지식인들과의 교류로 더욱 발전하였습니다. 중세 초기에 파괴되었던 그리스의 저서들이 이슬람을 통해 역수입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그리스 원전은 대부분 아랍 어나 시리아 어로 번역이 되었던 원저작을 다시 그리스 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학문

크리스트 교의 교리가 유일한 진리로 인정되었던 중세 유럽의 가장 중요한 학문은 신학이었습니다. 신학을 발전시키기 위한 보조 학문으로서 철학이 발달하여 '철학은 신학의 시녀'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이러한 중세의 신학적 철학의 가장 큰 주제는 크리스트 교의 교리와 가치를 인간의 이성과 결합시키는 문제였습니다. 즉, 크리스트 교의 교리를 뒷받침하기 위한 철학적 원리의 제공이 바로 중세 철학의 임무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중세 철학은 로마 말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은 교부들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교회의 아버지'란 의미의 교부는 초기 크리스트 교리의 정립과 교회의 발전에 이바지했던 사람을 말하며, 교부들은 그리스의 철학을 받아들여 크리스트 교리를 체계화하였습니다.

스콜라 철학은 이러한 교부 철학을 바탕으로 한 신학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를 집대성한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 대전>에서 신앙과 이성을 조화시키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13세기 이후 스코터스나 오컴 등이 신의 존재는 이간의 이성으로 판단할 수 없다 하여 신앙과 이성의 분리를 주장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한편에서는 자연을 합리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실험적 방법을 내세운 자연 과학자등이 등장하게 되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신앙의 약화에 반발하여 순수한 신앙을 강조한 신비주의자들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중세 학문의 중심지였던 대학은 교수와 학생의 배움의 공동체로 조직한 일종의 길드로서 자치권을 가지고 자율적으로 운영되었습니다.

 

예술

중세 초기에는 비잔티움 양식을 모방하여 교회를 건축하였으나, 10세기말부터 로마네스트 양식이 등장하였습니다. 중후한 돌벽과 돔형의 아치를 이용한 이 양식의 대표적인 건물이 피사 성당입니다. 12세기 중엽에는 고딕 양식이 출현하였습니다. 고딕 양식은 13세기 중엽 파리·랭스·아미앵·샤르트르 증지의 대성당에서 절정에 달한 모습을 보여 줍니다.

중세의 문학은 봉건 기사들의 생활상과 기사도 정신을 반영하여, 초기 게르만 영웅들의 모험담을 엮은 영웅 서사시, 무훈과 충성을 읊은 기사도 이야기와 낭만적 사랑을 노래한 서정시 등이 나타났습니다. 

 

미술

고딕 건축가들은 뾰족한 아치와 서까래로 지탱되는 반원형 천장, 건물 밖에 세워진 견고한 버팀벽을 사용하여 건물 벽면에 무게를 덜 받게 하여, 벽면의 두께를 얇게 만들고 천장을 더 높게 올릴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고딕 성당은 더 높이 올라갈 수 있었고, 벽면에는 창을 더 크게 낼 수 있었습니다. 그  창은 현란한 원색으로 채색한 유리 조각들로 채워 종교적인 주제를 묘사하는 그림을 넣었습니다. 높이 올라간 성당 건물과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내부의 신비로운 빛은 중세인들의 종교적 경건심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중세 유럽에서는 12세기에 들어 고딕 건축이 이전까지의 로마네스크 건축을 대신하여 지배적인 양식으로 등장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