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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티움_제국

 

732년 프랑스 남부의 투르와 푸아티에 지역에서 피레네 산맥을 넘어 진격하던 이슬람 세력을 막아 낸 카롤루스 마르텔은 유럽 문명을 수호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됩니다. 그러나 비잔티움 제국이 7세기에서 11세기에 이르기까지 이슬람 세력에 대한 방파제 구실을 하지 않았더라면 서유럽의 크리스트 교 문명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비잔티움 제국의 흥망

로마 제국은 4세기말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으로 분리되었습니다. 서로마 제국은 476년에 멸망하였지만, 동로마 제국은 그 뒤로도 약 1,000년 동안 존속하며 중세의 정치와 문화를 주도하는 세력으로 남았는데, 이 동로마 제국을 비잔티움 제국이라고 부릅니다.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건설한 도시로서 에게 해와 흑해를 이어주는 마르마라 바다에 돌출한 삼각형의 반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은 450년에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성벽을 개수하고 확장시킨 이래 외적의 공격을 막아 냈던 전략의 요충이자 동서 교통의 중심지로 번성하였습니다.

보통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를 세 시기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초기는 324년 콘스탄티노플이 건설되었을 때부터 7세기 중엽 이슬람 제국이 융성할 때까지로 제국의 번영기였고, 중기는 이후부터 1204년 콘스탄티노플이 십자군에 의해 점령될 때까지로 위축기였습니다. 말기는 그 이후부터 1453년 오스만 튀르크에 의해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의 붕괴기를 말합니다.

영토, 정치적 권력, 문화 등 모든 면에 있어서 초기의 비잔티움 제국이 가장 위대하였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다스리던 기간에 비잔티움 제국은 지중해의 거의 전 지역에 도시 문화를 전파하였습니다. 이 당시 비잔티움 제국은 크리스트 교와 그레코로만 문명을 독창적으로 융합시켰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을 편찬하고, 성 소피아 성당을 건립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6세기 이후 게르만 인들이 번갈아 비잔티움 제국에 침입하였습니다. 그 결과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는 축소되었고, 7세기에는 페르시아 인과 이슬람 세력이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는 물론 소아시아 지역까지 침투하여, 비잔티움 제국의 영광은 점차 퇴색해 갔습니다. 중기 이후 이러한 거듭되는 오침에 대비하여 비잔티움 제국은 군사령관이 군정과 민정을 모두 담당하는 군관구 제도와 농민에게 토지를 지급하고 군역을 부과하는 둔전병제를 실시하였습니다.

 

 

비잔티움 제국의 사회와 경제

비잔티움 제국은 상공업을 크게 장려하였습니다. 금속 제품, 직물, 유리 제품 등 여러 종류의 산업이 발달했지만, 특히 페르시아에서 비밀리에 전수해 오던 견직물 공업이 6세기에 수도승들의 노력에 의해 전래되어 가장 중요한 산업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산업은 정부가 강력히 통제했고, 흑해와 지중해를 잇는 교역은 강력한 해군의 보호를 받았습니다.

산업의 성공에서 얻은 경제력을 바탕으로 비잔티움 제국은 군비를 충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잔티움 제국이 국경을 방어할 수 있었던 것은 군사력보다는 탁월한 외교력 때문이었습니다. 비잔티움 제국의 경제력은 활력 있는 도시 문화의 밑바탕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인접 민족이나 서유럽의 방문객들은 비잔티움 도시의 화려함에 놀랐습니다. 

 

 

비잔티움 문화의 특징

로마 인들이 가장 위대한 재능을 발휘한 분야가 법률이었습니다. 로마 제국에서 새로운 법이 계속 만들어지고 기존의 수정이 가해졌던 것은, 제국이 팽창하면서 이전의 법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점들이 발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로마의 법이 완벽한 체계를 갖춘 것은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다스리던 비잔티움 제국에서였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은 후대의 법에 큰 영향을 미쳐, 오늘날 대부분 유럽 국가의 민법의 바탕을 이루고 있습니다.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네스토리우스 논쟁, 성상 숭배 금지령을 비롯한 수많은 종교적 이단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그것은 비잔티움 제국에서 종교에 대한 열정이 높았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당초 크리스트 교의 5대 교구는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크, 콘스탄티노플, 그리고 로마였습니다. 그러나 7세기 이후 이슬람 세력의 침입으로 로마와 콘스탄티노플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로마는 로마 가톨릭 교, 콘스탄티노플은 그리스 정교의 중심이 되어 서로 나누어졌습니다. 

로마 가톨릭과 그리스 정교는 1054년에 완전히 결별하였습니다. 서방 교회에서는 로마 교황이 지상권을 갖고 세속의 국경을 초월하여 모든 나라의 크리스트 교회를 지배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그리스 정교에서는 콘스탄티노플 총주교의 권위가 높지 않아 교회는 황제의 지배 아래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9세기경부터 나라별로 교회의 자립화가 시작되어 세르비아 정교, 러시아 정교, 루마니아 정교 등이 생겼고, 각 나라마다 총주교를 두었습니다.

 

비잔티움 문화의 영향

비잔티움 제국은 그리스 학문의 전통을 보존하고 연구하였으며, 제국의 공용 언어로 그리스 어가 사용되었습니다. 비잔티움 문명의 특징 중 하나는 성직자와 정부의 관료들이 같은 신분 출신으로서 비슷하게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러한 교육을 통해 얻은 예숙적 재능과 창조력을 종교적 의식을 발전시키고 교회를 장식하는 데 쏟아부었습니다. 비잔티움 문명의 모자이크, 성상, 조각, 건축 등은 이러한 배경에서 태어났습니다.